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나 보다. 호우주의보 속에 어제 저녁부터 비가 오다 그치고, 그치다 오곤 한다. 오늘처럼
궂은 날씨로 분위기가 우중충하고 마음이 거뭇해지는 날엔 꽃을 보고 와야 머리 속이 산뜻해 온다.
비가 오는 날에도 지금 한창 꿈을
꾸는 나무가 있다. 자귀나무다. 그동안 감자를 캐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꿈꾸는 나무를 자주 보지 못해 눈에 진물이 날 정도다. 자귀나무는
밤마다 꿈을 꾸기 때문에 '잠자는 귀신 꽃'이라 한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엔 대낮에도 꿈을 꾸며 졸음에 겨운 듯 어슴푸레한 눈빛으로 다가와
사람의 마음을 안개 속으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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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색의 자귀꽃, 그러나 밑부분은 흰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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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윤희경 |
| 북한강가에는 자귀나무 보기가 힘들다. 주로 따뜻한 남쪽에서 자생하기
때문이다. 시골로 들어오던 해 어린 묘목 몇 그루를 집 근처 여기저기에 심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비실비실 다 죽고 공교롭게도 뜰 밖
샘터에만 한 그루가 살아나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피어나 무더위를 식혀주고 있다.
자귀 꽃은 여전히 멋쟁이다. 서슴지 않고 칠월의 왕
꽃으로 부르고 싶다. 칠월엔 나무 꽃이 귀한 때이기도 하지만, 자귀 꽃만이 갖고 있는 그 우아함과 넉넉함은 금방 가슴을 시원스레 씻어 내린다.
언뜻 보기엔 우산 모양 같기도 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꽃 관을 쓰고 있는 자태이다. 꽃술들은 하나하나가 빗살무늬로 끝 부분은 연분홍색 솜털인가
하면, 밑 부분은 하얀 새털 모습이다. 공작새의 깃털처럼 생긴 꽃물은 마치 집시여인이 추는 캉캉 춤을 보듯, 폭죽이 터지는 순간처럼 서늘한 꽃
향을 뿜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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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새털, 공작새 깃털의 빗살무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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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윤희경 |
| 원산지는 아시아 또는 중동지방의 따스한 곳으로 알려졌으나 우리 생활과도
아주 가까운 정원수이다. 우리 조상들은 자식을 낳으면 창가에 자귀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쑥쑥 자라 잎이 무성하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자식들의
성혼식을 올리고 자귀나무 창가 방에서 신혼살림을 꾸리게 했다. 자귀나무는 잎과 꽃이 넉넉하고 흐드러지게 피어나 다산을 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합환목, 합환수, 야합수, 유정수… 등등 이름만큼이나 부부의 금슬을 돈독히 해내는 '애정목'으로 사랑을 받아온 나무이다.
증명이나 하듯 자귀나무는 이름 그대로 '잠자는 귀신 나무', '자는 나무'이다. 그래서일까. 자귀나무 잎들은 오늘도 무성하게 자라나 비 오는
날이나 밤만 되면 작은 잎들이 짝을 맞춰 비비적대고 있으니 신통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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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나무의 무성한 잎과 꽃들, 원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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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윤희경 |
| 자귀나무는 농사꾼의 나무이기도 하다. 이른 봄 움이 트기 시작하면 용케도
서리 내림이 끝이 난다. 그러면 고추 모종을 밭에 내다 심고 씨를 뿌린다. 첫 꽃물이 터지면 콩과 팥 씨를 뿌리고 꽃이 지면 들깨 모종을 낸다.
뿐이랴, 자귀나무 잎은 소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아마도 잎이 풍겨내는 순한 냄새와 은은한 향기가 소의 입맛을 당기게 하나보다. 소가 하도
좋아하다 보니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저 '소쌀나무'라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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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맞은 자귀꽃, 사뭇 폭죽 터지는 불꽃놀이를 보듯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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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윤희경 |
| 오늘처럼 소낙비가 오락가락하고 밤 깊어가는 신혼창가에 자귀 꽃 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면, 잘은 몰라도 신혼 방에선 또 다른 소나기가 내리고 천둥이 칠 것이다. 지금도 소낙비에 흠뻑 젖은 자귀 꽃들이 툭툭 떨어져
흐느적거리고 있다. 어느 신혼 창가에 자귀 꽃 빨간 깃털이 춤을 추고 연둣빛 실크드레스가 펄렁거리는 모습을 떠올리노라니 회심의 미소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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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은 언제나 짝이 맞춰져 있다. 금슬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 할 것이다. 뒷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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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윤희경 |
| 그러나 저러나 낮에는 농사일로 밤에는 글줄이나 쓴다며 바쁘게 살다 보니
부부의 정이 많이도 뜨악해졌나 보다. 며칠 전엔 안 사람이 남의 말처럼 한 마딜 쓱 스치고 지나갔다. 누구보다도 금슬이 좋기로 소문난 아래 집
아줌마 애기라며 '같이 사노라니 부부이지 남이나 다름이 없다더라'고. 아니, 뜬금없이 이 말을 누구 보고 들으라 한 얘기일까. 슬쩍 넘어간
말이긴 하다만 소릴 듣는 순간,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아랫도리를 스쳐가며 맥이 쭉 빠지는 이유는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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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만 되면 서로를 향해 오그라드는 잎들의 앞 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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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윤희경 |
| 아직도 장맛비가 북한강을 적시고 있다. 며칠간을 더 내리겠다는 예보이다.
나도 오늘 밤엔 자귀 꽃이나 두어 송이 따다 술잔에 띄워놓고 신혼 시절 합환주에 취해 첫날밤을 지새우던 뜨거운 밤이나 회상해 볼까. 아니면
싱그러운 자귀 꽃 향을 맡으며 오랜만에 야한 영화나 한 편 감상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