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발전 50년은 전 국민의 대하드라마”
2012년은 엔지니어들에게는 새로운 감회를 주는 의미 깊은 해이다. 총선과 대선이란 정치 행사가 있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크게는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 소득 80달러에서 오늘날 2만달러에 이르는 천지개벽을 하는데 시동을 건 해이기 때문이다.
1962년 1월 5.16 혁명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고, 불과 보름의 준비를 거쳐 2월 3일, 울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지구 기공식을 가졌다. 이후 국가는 총력 경제개발 체제에 들어가 줄기차게 경제개발 외길을 걸어왔다. 이 과정에서의 일등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엔지니어들이라고 할 수 있다.
2012년은 우리나라가 공업화를 시작한지 반세기라는 측면에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50년을 전망해본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꺼내게 하는 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뜻 깊은 해를 맞아, 개발연대에 박정희 대통령의 참모로 18년간을 한국 경제 개발 일선에서 밤낮을 잊고 전력 질주한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 수석을 만나 뵈었다. 이 자리에는 한국엔지니어클럽의 이부섭 회장(동진쎄미컴 대표)과 이승구 부회장(전 과기부 차관), 장준호 홍보위원장(인포뱅크 대표) 등이 함께했다. 이 자리는 청와대에서 오 수석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사사를 받은 고정식(전 특허청장) 부회장이 주선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번영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중화학 공업 및 방위 산업 국산화 계획을 세워 '한국 경제의 설계자'로 인식되고 있는 오 수석은 자리에 앉자마자 나라 걱정을 시작했다. "국제 경제가 요동치는 가운데 앞으로 10년, 더 나아가 50년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밤잠이 잘 안 옵니다."
지난 반세기가 안보 위협과 2차에 걸친 오일 쇼크, 자원난 등등의 위기를 헤치며 우여곡절 끝에 2만 달러에 까지는 이르렀지만 현재의 기술 투자나, 장관이나 국회의원에 이공계가 출신이 가뭄에 콩 나듯 하는 현실을 볼 때 미래가 불안하다고 생각되기 때문.
오 수석은 지난 50년을 회상하며 "제일 큰 주역은 60년대 파독 광부 및 간호사, 여공, 월남 파견 근로자, 70년대 중동 근로자 및 기능공, 그리고 과학자"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세계에서 유례없는 한국의 초고속 성장은 전 국민이 힘을 합쳐 써내려간 대하 드라마였다는 것.
일례로 지난 70년 당시 IBRD(국제개발은행) 총재인 맥나마라의 방한에 얽힌 여공들의 일화를 소개한다. 맥나마라 총재가 공식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부인은 가발공장을 보고 싶다고 해 오 수석이 구로공단으로 안내했다. 서울통상이란 가발 회사 공장에 들어가 공장 문을 열자마자 총재 부인은 두 손을 들고 놀랐다. 1천여명의 20대 여성이 쭉 줄지어 앉아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 게다가 시찰하는 동안 외부 인사에는 눈길도 안주고 가발만 만들고 있었다.
맥나마라 부인은 공장을 둘러 본 뒤 "생애 가장 인상 깊은 산업 시찰이었다. 당초 몇 십 명 규모가 아닐까 했는데 1천여명에 이르렀고, 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이 나라는 반드시 번영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게도 그 인상을 전했고, 이를 계기로 맥나마라 총재의 한국에 대한 인식도 훨씬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뀌게 됐다고 한다.
기능공들과 관련해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중동 건설 현장에서 단순 노무가 아니라 부가가치가 높은 기능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공고 졸업생들을 특별 훈련을 해서 중동에 보낼 필요가 있었다는 것. 박정희 대통령은 고교를 졸업하면 18세인데, 이들을 부모 곁에서 떼어내 이역만리로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당초 반대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기능을 갖춘 인력이 필요한 만큼 대안이 없었고, 결국 이들을 강훈련을 시켜서 보냈고, 그 결과 중동의 오일머니가 우리의 수입이 되며 오일 쇼크를 넘어설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주영 현대 건설 회장이 박 대통령으로부터 큰 점수를 따게 된 일화도 소개한다. 무역 관련 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정 회장의 노고를 칭찬하면 정 회장은 "저 보다도 기능공들이 일을 잘해 주어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답했다는 것. 그러면 박 대통령은 또 정 회장의 그런 태도가 맘에 들어 구축함과 자동차 등의 새로운 과업을 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오 수석은 한국 공업 부흥의 씨앗으로 공군을 꼽기도 했다. 군사 혁명으로 이공계 인력이 필요할 때 준비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공군 출신 장교들이었다는 것. 배경은 이렇다. 6.25가 발발하며 청년들은 누구나 군인으로 참전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이 때 당시 공군본부 행정참모부장 김창규 씨(후일 공군참모총장)가 장차 나라 건설을 위해서는 이공계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며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공군 기술장교 제도가 그것. 이공계 사람으로 대학 재학 중이나 학위를 가진 사람은 무조건 받아들였다. 최형섭 전 과기처 장관이 그 혜택을 받았고, 오원철 수석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이 제도로 공군 기술 장교가 된 사람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고, 이들이 후일 상공부의 주요 간부로 테크노크라트로 역할을 했으며, 산업계에서도 큰 활약을 하게 된다. 선견지명을 갖고 이공계 인력들을 온전하게 보전, 육성시킨 김창규 총장을 비롯해 공군의 역할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이날 참석자들은 생각을 같이 했다.
우리나라 경제개발 과정에서 씨드 머니를 마련한 사람들은 단연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다. 이들은 가서 육체노동을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졸자들도 많았다. 광부 일이 어려운 만큼 독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사람들은 드셌다. 특히 터키 출신의 광부들은 칼을 차고 다니며 위압적으로 행동하고 위협을 가하는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상대하기에는 벅찬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눌리며 살아갈 수는 없는 법. 학사 출신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간부들은 터키 광부들을 제압하기 위해 지혜를 짜냈다. 광부들이 칼 등을 차지 못하는 유일한 경우는 일을 끝내고 목욕탕에 있을 때. 비무장 상태여야 맞상대가 가능하다고 보고, 작전을 짰다.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 터키 광부를 일진에 태권도 하는 사람들이 가격했고, 대응하는 이들을 이진의 유도하는 사람들이 바닥으로 들어 메쳤다. 이어 일어나는 사람들을 권투를 하던 삼진이 제압하는 작전을 편 것. 터키 사람들은 한 번 당한 다음에는 작은 고추가 메운 줄 알고 그 이후에는 행패를 부리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오 수석은 이 일화를 전하며 오늘날 우리의 번영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일치단결해 만난(萬難)을 헤쳐 나갔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며, 지난 반세기의 피와 땀의 역사가 온 국민들, 특히 초중고생들한테 생생하게 전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오 수석은 다시금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자원은 없고 인구는 많으니 그 인구를 먹여 살리려면 자원을 가져다 고부가가치의 물건을 만들어 수출하는 공업을 육성하는 길밖에 없고, 거기엔 과학기술이 중요하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독일에서 일한 광부와 간호원, 월남의 파병 군인들, 중동의 기술자들, 여공들의 한 일과 과학기술자들의 일이 다 다르지만 비슷비슷한 의미라고 했다. 종류가 다를 뿐 인력을 팔아 외화를 벌어들였기 때문이다.
이부섭 회장은 오 수석의 이야기를 들으며 “해외에 보낸 노동자들이 자국으로 돈을 보내고, 자국 노동자들이 번 돈을 국가가 관리해서 경제개발에 쓴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며 “그들 하나하나가 다 영웅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국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어떻게 성공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으며, 몇몇 나라들에서는 유사한 방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우리도 잘 살아보자’고 한 마음으로 노력했는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또 당시에 경제개발과정에 참여했던 기업들 역시 각자의 역할을 다했다. 지금에 와 정경유착이나 특혜라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에는 선택권이 없는 문제였다. 나라도 국민도 가난하던 시기, 조금의 투자라도 할 수 있고 큰 공장을 경영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부족할 때였다.
금성은 전자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모래사장을 정지해 구미공단을 조성, 저가정책을 펼쳤지만 다들 주저하고 아무도 안 들어간다 할 때 제일 먼저 들어와 크게 자리를 잡았다. 이에 다른 기업들도 금세 자리를 채웠다.
삼성은 정밀가공과 관련해 무(無)에서 유(宥)를 창조하는 역사를 썼다. 특히 비디오플레이어에서 똑같은 속도로 10만번 회전하는 헤드를 만드는 고난도 기술을 해결함으로써 정밀가공 관련 기술력을 크게 높였으며, 이후 시계, 카메라, 비행기 엔진, 전자레인지, 전자오븐 등 많은 것을 만들어냈다.
현대 역시 중동 건설 수출의 물꼬를 트고, 조선 산업과 자동차 산업에서 불가능할거라 예상됐던 일들에 성공을 거뒀다. 다만 조선소 건설 과정에는 한 가지 좀더 사실적인 해설이 필요하다. 거북선이 새겨진 500원권 지폐로 영국은행을 설득한 것 뒤에 다른 배경들도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4대 핵공장’ 중 하나였던 조선공업을 위해 페르시아 걸프 조선회사를 설득해 배 7척을 제조한 실적이 있었다. 엔진이며 스크류며 모든 부품을 사다가 육지에서 용접만 한 사례였지만 당시 목적은 이익이 아니라 실적이었기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도 반드시 진행했던 일이었다. 배 7척을 만들자 세계14대 조선국이 됐고, 평가가 좋았으며, 전 세계적으로 소형배 수요가 늘어나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다. 조선공업은 국가적인 전략과 경영자의 기지가 잘 어우러져 성공한 사례다.
1960~70년대는 테크노크라트들의 시대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박충훈 부총리, 오원철 수석, 최형섭 장관 모두 이공계를 전공한 테크노크라트였다. 지금의 중국 정부가 그렇듯이 기술관료들이 국가의 큰 그림과 발전 전략을 짜고 각기 맡은 분야를 책임지고 실행하고 있다.
오 수석은 가장 장기간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공직업무를 맡았던 까닭에 그의 담당이었던 중화학공업은 물론이고, 방위산업과 기계·전자, 대덕 연구단지 등에서 기초 계획을 세웠다. 초창기 상공부 과장·국장시절에는 중소기업을 맡아 경공업 수출 활성화를 이끌기도 했다. 그는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로서 과학기술정책가의 원조로도 꼽히고 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오 수석은 마지막으로 함께한 후배들에게 “열심히 보람을 갖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본업이 되고, 본업은 곧 복이 된다”며 “국가와 과학기술계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그 날 오 수석의 이야기를 들은 장준호 대표는 “공과대학 출신으로서 우리나라 근대화와 궤를 같이하신 오 수석을 30년 전부터 존경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보수와 진보 등 이념을 떠나 우리 사회가 지켜야할 가치가 무엇인지 당당히 말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며 “역사는 간절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 바꾸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