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김훈의 '칼의 노래'-최후의 전투

려초 2005. 9. 15. 15:38











# 노량의 물결은 사나웠다.
적들은 바다를 뒤덮고 달려들었다.
검은 깃발의 선단이 서쪽 수평선을 넘어왔다.
광양만을 떠난 순천의 적들이었다.
남쪽 수평선 위에 붉은 깃발들이 무수히 나타났다.
남해도에서 발진한 적 육군의 보충대였다.
내가 닿을 수 없었던 먼 적들이었다.
검은 깃발의 적과 붉은 깃발의 적 사이로,
흰 깃발의 선단이 돌격 대형의 장사진을 펼치고 다가왔다.
사천의 적들이었다.
적들의 살기는 찬란했다.
적선에 가려 수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내 앞에 드러난 적의 모든 것이었다.

그때, 적들은 경건해 보였다.
적은 경건했다기보다는, 적이야말로,
그 앞에서 내가 경건해야 할 신비처럼 보였다.
신비, 신비라고나 해두자.
나는 대장선 갑판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빌었다. 무엇을 향해 빌었는지 나는 빌고 있었다.
바다는 문득 고요했다.


# 나는 물러섰다.
적은 다가왔다.
물러서는 물길의 섬마다 복병의 선단을 떼어놓았다.
적의 종심은 길어졌다.
불화살을 올렸다.
격군장들이 북을 울렸다.
섬 뒤에 배치한 내 복병들의 선단들이
섬의 날뿌리를 돌아나왔다.

복병들이 적의 대열을 옆에서 찔러 토막내기 시작했다.
적의 대열은 흔들리면서 끊어졌다.
나는 적 쪽으로 이물을 돌렸다.
함대의 주력으로 적의 선두를 부수어나갔다.
위태로운 근접전이었다.
복병 선단의 수졸들이 마른 볏짚을 적선으로 던졌다.
적병들이 볏짚을 던지는 내 수졸들을 조총으로 쏘았다.
내 射夫들이 적선에 쌓인 볏짚에 불화살을 꽂았다.
바람은 나의 편이었다.
적의 육군은 무장하지 않았다.
적은 육군은 다만 배위에 실린 화물이었다.
불붙은 적선에서 적병들은 물위로 쏟아져 내렸다.
적의 선두 주력이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적은 다시 넓은 바다로 향했다.
적이 방향을 돌릴 때
적선의 우현이 일제히 내 앞쪽에 노출 되었다.
총통을 집중시켜 적의 우현을 부수었다.


# 날이 저물었다.
적은 전선 수십 척을 앞으로 내보내
내 함대의 화력을 돌려놓고
그 옆으로 주력을 빼돌리려 했다.
일부를 죽여서 주력을 철수시키려는 적의 의도는 초전부터 확연했다.

밤중에 전투는 소강이었다.
적을 멀리서 포위한 채 바다에서 밤을 새었다.
새벽에 주먹밥으로 장졸들을 먹였다.
포위망을 조이면서 적에게 다가갔다.
대열의 계통을 버리고 적들은 산개했다.
적들은 내 포위망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전투는 난전으로 돌입했다.
진은 무너지고 대열은 흩어졌다.
지휘통제는 작동되지 않았다.
기나긴 하루였다.
적병들의 시체가 노와 노 사이에 끼여 으깨졌다.
불붙은 적선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 노를 저어와
내 대장선의 고물을 들이받고 깨어졌다.
격군들은 기진맥진했다.
사흘 밤을 재우지 못했다.
적선 백여 척이 관음포 안 내항으로 달아났다.
거기는 퇴로가 없는 물목이었다.
적들은 항로를 오인한 모양이다.
나는 중군을 몰아 포구의 어귀를 막고 안쪽을 찌를 판이었다.

나는 대장선 장대에서 소리쳤다.
- 관음포가 급하다. 관음포로 가자.
그 때 적선 2척이 내 대장선 앞뒤로 달려들었다.
난간에 도열한 적들이 일제히 무더기로 쏘아댔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바닥에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렸다.
송희립은 나를 선실 안으로 옮겼다.
고통은 오래 전부터 내 몸 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내 갑옷을 벗기면서 송희립은 울었다.
- 나으리, 총알은 깊지 않습니다.

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총알은 임진년의 총알보다 훨씬 더 깊이,
제자리를 찾아서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 송희립은 갑옷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북을 울렸다.
난전은 계속중이었다.
싸움의 뒤쪽 아득한 바다 위에서 노을에 어둠이 스미고 있었다.
나는 심한 졸음을 느꼈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 註, 공을 가장 닮은 셋째아들 이름이 면이다.
고향 아산서 가족들을 지키려다 왜군들에 의해 죽었다)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如眞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듯 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

( 註, 1598년 11월 19일. 공의 나이 쉰넷.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
이 노량대첩에서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50여 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다.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
임진년 1592년에 발발한 기나긴 전쟁은 이날 끝났다.)